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Hugo Bize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Domaine Simon Bize, Hugo Bize — 사비니 레 본
3월 투어의 마지막 방문지는
사비니 레 본(Savigny-lès-Beaune)의
시몬 비즈(Simon Bize)였다.
대문 앞에서 우리를 맞이한 건 티없이 맑은 얼굴의 청년이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건네는
휴고 비즈(Hugo Bize).

솔직히 처음엔 조금 깼다.
비녜롱이라고 하면 으레 흙이 묻은 손에 투박한 옷차림을 떠올리게 되는데,
눈 앞의 사람은 너무 멀끔했다.
(Sorry mate lol ㅋㅋㅋ)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이질감은 내가 잘못 세팅한 기대치의 문제였다. (변명은 뒤에서 하겠다.)

투어는 마침 같은 시간대에 방문한 두 팀이 더 있어 그들과 함께 진행했는데, 다수의 인원이었다 보니 깊이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였다.

밀도있는 취재에는 실패했지만,
휴고와 저녁을 함께하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는 우선 한국에 들어왔다.

밀린 일과와, 행사 준비를 하니
어느덧 약속의 4월이 왔다.
휴고가 한국에 왔다.
그의 첫번째 한국 방문이라고 했다.

휴고가 이야기하는 도멘의 이야기를 듣는시간,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를 사로 잡았다.
도멘은 1800년대부터 시작된 역사 깊은 곳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몬 비즈를 만든 것은 휴고의 아버지 패트릭 비즈(Patrick Bize)였다.
패트릭은 1972년 도멘을 물려받았을 때 해병대를 갓 전역한 청년이었다.
포도 재배도, 양조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다. 그를 도운 건 친절한 이웃들이었다.
(그 이웃이 마침 라퐁과 후미에였다는 건 안비밀이다).
패트릭은 그들의 조언을 받아가며 조금씩 양조가로 변해갔고, 결국 도멘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경지에 다다랐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리를 꽝 맞은 기분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는 것

완성형으로 시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 2024년에 도멘에 합류한 휴고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양조학교를 졸업하고 신대륙에서 와인메이킹을 경험한 뒤 돌아온 청년. 패트릭이 그랬던 것처럼, 도멘의 이야기를 새로 써나가는 챕터의 첫 페이지에 있는 사람. 나는 그 챕터 1을 읽고 있는 첫 번째 독자 중 하나인 셈이었다.
삐딱하게 휴고를 바라보던 나는 그렇게 무장해제 되었다.
(절대,잘생겨서 그런거 아닙니다.)
그리고, 그와 이야기를 더 해보면서, 앞으로의 실마리들을 찾을 수 있었다.

나의 목표는 우선 도멘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포도 재배와 양조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발현되는 나만의 취향과 개성이 도멘에 녹아들길 바란다. — Hugo Bize
그럼 도멘의 정체성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은 "홀 번치(Whole Bunch)"였다.
패트릭이 처음 양조를 배울 때 이웃들이 귀띔해준 방식이었다. 한번 빠져든 이후로 줄곧 그 길을 걸어왔다. 어떤 빈티지에 디스템(Destem)으로 시도해봤다가 단단히 망쳤다는 일화도 있다. 그 이후로는 오직 홀 번치. 그것이 시몬 비즈가 시몬 비즈인 이유다.

그런데 그 정체성 옆에 조용히 자라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AKA(あか) et SHIRO(しろ)
일본어로 빨강과 하양.
패트릭이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 치사 비즈(Chisa Bize)가 도멘을 이끌면서, 유기농과 바이오다이나믹 방향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흐름에서 태어난 것이 이 두 뀌베다.
이산화황 무첨가, 완전한 내추럴 방식으로 만든 소량의 실험적 뀌베들,
사실 이 뀌베들은, 동복의 이란성 쌍둥이들이 있었다.
AKA(아카)와 Savigny les Beaune Rouge(사비니 레 본 루즈)
두 뀌베는, 사비니-레-본의 "부르조(Bourgeots)"와 "플랑쇼(Planchots)" 2개의 구획에서 자란 포도를 사용해 만든 와인이다. 차이는 온전한 내추럴 방식의 유무이다.

SHIRO(시로)와 Bourgogne Les Perrieres Blanc (부르고뉴 레 뻬리에르 블랑)
부르고뉴 레 뻬리에르 밭의 샤르도네로 만든 블랑이다. 북향의 고도가 높은 숲을 등지고 있어 늘 서늘함이 있는 곳, 과실의 프레시함과 미네랄이 경쾌하다.

정규 라인업과 같은 포도밭에서 나온 같은 포도로, 양조 방식만 다르게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들. 테이스팅을 하며 모두가 이 두 뀌베에 주목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두 뀌베가 곧 생산 중단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의아했다.
하지만 이유를 듣고 나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AKA와 SHIRO는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수렴하는 것이었다.
내추럴 방식으로 완성도 높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충분히 증명되면,
그 방식이 도멘의 정규 라인업 자체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는 사비니-레-본 루즈, 부르고뉴 레 뻬리에르 블랑으로 출시되는 것이다.
쌍둥이는 이별하는 게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두 점이 하나의 방향으로 달려가 만나면, 거기서 다시 하나의 선으로 뻗어나간다.
그 선의 끝에 휴고가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를 만나고 왔다.
챕터 1은 늘 이렇다.
앞으로의 이야기를 전개하기에 필요한 설정들을 설명하기에 큰 재미가 없는 구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이탈하지 않는다면,
다음 챕터부터는 결말까지 휘몰아치는 경험을 할 것이다.
언젠가 N번째 한국 방문을 할 휴고는 수염이 덮수룩하고 손이 거친, 누가 봐도 진정성 있는 생산자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가 만난다면
웃으며 시시콜콜한 챕터1의 이야기를 나눌것 같다.

순댓국 먹은 이야기 뭐 그런것들.
휴고의 무운을 빌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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